[인터뷰] 한인사회 원로 정세권 전 한인회장

정세권 전 워싱턴한인회장은 한인 이민의 물결이 한창 밀려오던 1978년 미국에 첫발을 디뎠다. 뉴욕에 잠시 거주했던 것을 제외하면 거의 40년을 워싱토니언으로 살고 있다.

지나온 세월을 돌아볼 때 ‘만족스러운 삶’이었다고 스스로 평가한다. 미국 직장(코카 콜라)에서 중역으로 은퇴할 때까지 열심히 일했다. 함께 온 가족들은 모두 반듯하게 신앙생활하며 유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전통적인 유교 집안의 며느리였던 어머니는 “미국 가면 예수 믿으마” 하시더니 약속을 지키셨다.

“한국에서 계속 살았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봅니다. 여기서보다는 훨씬 험한 인생이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상상하는 이유는 꼭 경제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라는 것은 그를 아는 사람은 쉽게 추론할 수 있다.

80이 가까운 나이라고 볼 수 없는 건강을 유지하며 한인사회에서 그야말로 ‘노익장’을 과시하는 비결은 뭘까? 그는 ‘건강하게, 행복하게’ 사는 원리를 이민 초기에 배웠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려면 그 때로 돌아가야 한다.

<봉사와 참여를 자청한 사람>

“당시 한인사회에는 어려운 분들이 많았죠. 제가 영어를 할 줄 아니까 이웃 한인들이 도움을 자주 요청했어요. 운전면허증도 함께 따주고, 여기저기 관공서도 가주곤 했어요.”

입사한 코카콜라 회사의 업무도 그의 눈을 뜨게 했다. 업무상 식품업계, 요식업계, 세탁업계 등에 종사하는 한인들을 많이 접촉할 기회가 있었다. 물론 아시아계 주민들도 그의 주요 고객이었다.

안타까운 점이 발견됐다. 미국 한복판에 살고 있으면서도 한인들이 대부분 주류사회와 괴리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부터 달라지자는 생각에 다른 소수민족들과 자주 어울렸다. 이민 온지 10여년이 됐을 무렵엔 아태계 친선 및 권익옹호단체라고 볼 수 있는 ‘Asian Pacific American Heritage Council’ 회장도 맡았다.

이 시점에서 아태계 커뮤니티는 중요한 전기를 맞게 된다. ‘아태문화유산의 달’ 기념 법제화가 그것이다.

“매년 5월 첫 주를 아태계 주간으로 지켜오다가 미 의회가 아태계의 달로 바꾸는 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 이후 미 정부가 아태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져 일년에 한 번씩 브리핑에 초청받아 갔지요.”

한인 1.5세, 2세들의 시민운동단체 KAC(Korean American Coalition) 결성과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나중에 한인회장이 된 뒤에는 한인회 차원에서 차세대를 위한 세미나도 자주 열었다.

“지금 보면 아쉬운 게 많아요. 한인 커뮤니티나 중국 커뮤니티나 1, 2세들의 협력과 소수계간 유대가 줄어든 것 같습니다. 물론 한인정치 풀뿌리운동, CKA(Council of Korean American) 등이 요즘 활동하고 있기는 하지만 커뮤니티 내의 시민운동 적어졌다는 느낌입니다. 임소정 한인연합회장처럼 젊은 한인들이 단체장을 맡는 사례가 늘어나 다행이기는 하지만.”

<한인 회장 당선>

월급장이가 무슨 출마를? 워싱턴 한인회장에 나가보라는 주위의 권유에 가진 생각이었다. 그 때는 성공한 사업자들이 많이 회장을 맡았고 선거 캠페인 비용도 엄청났다.

한인회 부회장은 러닝메이트로 당선돼 활동했지만 회장은 달랐다. 전혀 생각을 안하고 있었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바뀌더니 후보가 돼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돈은 없었다.

친구, 지인, 이웃들이 50달러, 100달러씩 모아 경비를 마련했다. 홍보 전단지를 만들어 일일이 우표를 붙여 가정에 보내느라 며칠을 밤샘했다.

떨어졌다. 49표 차의 석패였다. 하지만 경험이 생겼고 자신이 붙었다. 1992년 가을 다시 출마하게 됐고 상대 후보를 몇 백표 차이로 누르고 26대 회장이 됐다.

회장으로서 했던 일 가운데 가장 보람 있는 것 중 하나는 한인회보 발간이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워싱턴 한인사를 만드는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회보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다 보니 미주한인 이민사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민족서로돕기 워싱턴 공동대표를 지낸 채영창(2004년 작고) 씨 등이 편찬위원장이 돼 작업에 들어갔다.

하와이에 사탕수수 농장 인부들이 첫발을 디딘 1903년보다 20년이 앞선 1883년을 미주 한인 이민사의 시작으로 잡았다. 보빙사절단이 워싱턴에 처음 온 해였다. 1883년부터 1993년까지 110년의 워싱턴 한인사는 그렇게 나왔다.

<이민 100년의 역사 정리>

인간에게 인연과 계기는 중요하다. 역사는 그것들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그런 기회를 만났을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본인 문제다.

“2001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민족대표자회의에 갔을 때입니다. 하와이에서 온 대표자가 그 지역에 ‘미주한인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를 만들었다며 워싱턴에도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더군요.”

그 아이디어에 김웅수 장군, 정규섭 제독, 최제창 박사들이 “우리가 살아있을 때 해야 한다”며 적극 지원을 약속했다. 기념사업회-워싱턴이 조직됐고 박윤수 박사가 회장이 됐다.

당시 미주한인회총연합회 기획조정실장을 맡고 있던 그도 부회장이 돼 열심히 일했다. 2003년 DC 힐튼 호텔에서 전국 만찬이 성대히 열렸다.

좋은 일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법. 전국에서 모여든 한인 지도자들은 다시 ‘미주한인의 날’이 있어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 그 후 어떻게 캠페인이 전개되고 미 정부가 소수계 최초로 미주한인의 날을 법으로 공포하게 됐는지는 다 잘 알고 있다.

<한인들만의 큰 잔치를>

“코카콜라에서 일할 때 사장이 ‘봉사도 일하는 시간으로 쳐줄테니 열심히 참여하라’고 하는데도 잘 안하더라구요. 전 반대였죠. 물론 근무 외 시간에 말입니다. 한인단체들이 행사를 하면 열심히 후원해 주고 장학금도 주고 했습니다. 회사가 손해를 봤을까요? 더 좋아하더군요.”

아버지를 자주 못보던 10대 아이들은 처음엔 불평했다. 그러나 커서 보니 아버지가 한인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더란다.

세월이 흘렀으니 워싱턴 한인사회가 발전했을까? “인구는 많아졌지만 그렇다고 꼭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다”는 게 솔직한 생각이다. 무슨 일이든 참여도 면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정치만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한인회장을 한 번 하고 사라지는 사람이 많은데 그것도 이해 못할 일이다.

“이런 거 한 번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아이디어만은 아닙니다. 이태식 전 주미대사도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전국 한인 지도자들이 모이는 겁니다. 축제, 컨퍼런스, 박람회가 합쳐진 잔치 한마당을 여는 겁니다. 한인사회의 존재감을 주류사회에 크게 알리자는 거죠. 전국 한인들이 모여서 네트워킹하며 새로운 미래를 함께 만드는 겁니다.”

자칫 남에게 자신만 내세우는 꼴이 될까봐 조심스럽다는 정 전 회장이 새로 꾸는 꿈이다.

그는 2004년 한국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이병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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